【서울고등법원 2024.3.28. 선고 2022누30661 판결】

 

• 서울고등법원 제9-1행정부 판결

• 사 건 / 2022누30661 유족급여및장의비부지급처분취소

• 원고, 항소인 / A

• 피고, 피항소인 / 근로복지공단

• 제1심판결 / 서울행정법원 2021.11.25. 선고 2020구합76142 판결

• 변론종결 / 2024.01.25.

• 판결선고 / 2024.03.28.

 

<주 문>

1. 제1심판결을 취소한다.

2. 피고가 2019.9.23. 원고에게 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을 취소한다.

3. 소송 총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청구취지·항소취지>

주문과 같다.

 

<이 유>

1.  처분의 경위, 관계 법령, 원고의 주장 요지 및 인정사실

 

이 법원이 이 부분에 관해 적을 이유는, 아래와 같이 고치거나 덧붙이는 것 말고는 제1심판결 이유 제1 ~ 3항, 제4의 나.항 기재와 같다. 그러므로 행정소송법 제8조제2항, 민사소송법 제420조 본문에 따라 이를 그대로 인용한다(제1심판결의 별지 포함. 여기서 설정된 약칭도 아래 ‘망인’을 제외하고 그대로 사용한다).

○ 제1심판결 2쪽 1행 “내렸다.”를 “하였다.”로 고친다.

○ 제1심판결 2쪽 9행 “망인”을 비롯하여 제1심판결 이유 제1, 3항, 제4의 나.항에 적힌 “망인”을 모두 “고인”으로 고친다.

○ 제1심판결 10쪽 글상자와 [인정근거] 사이에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6) 한편 이 법원의 촉탁에 의해 고인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자살 사이의 인과관계 등을 감정한 O대학교 법의학교수 F이 2023.12.6. 제출한 감정결과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스트레스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계량화할 수 있는 의학적 기준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 관점에서 고인이 어느 정도 부담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행위에 대해 이전의 상태가 책임이 있다고 할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적지 않게 다른 의견이 제시될 수도 있을 만한 상황으로 보인다.

나) 논란이 되는 사건 이후 나타난 행동들(고인이 자살시도 5일 전인 2018.1.11. 무단결근한 것 등을 말한다)은 일련의 연속적·신체적·심리적 반응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지만, 이는 후향적 판단일 뿐이다. 보다 적극적 판단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제시된 자료들만으로는 단정적 의견을 주기 어렵다.

다) 고인에게 우울 증상이 있었다고 본다.

라) 자살 사례에서 원인을 하나만으로 특정해 제한할 수 있는지 의문이 없지 않다. 제시된 자료 역시 그다지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마) 고인이 심신상실 혹은 정신착란 등의 상태에 있었다고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바) 피고의 이 사건 처분사유에 대해 전반적으로 크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 제1심판결 10쪽 [인정근거]에 있는 “증인 H”을 “제1심 증인 H”으로 고치고, 여기에 “감정인 F(이하 ‘이 법원 감정의’라 한다)에 대한 이 법원의 감정촉탁결과(이하 ‘이 법원 감정서’라 한다)”를 덧붙인다.

 

2.  자해행위로 인한 업무상 재해에 관한 법령·판례의 변천과 이 사건의 판단 기준

 

가. 법령의 변천과 그 취지 등

1) 종전 산재보험법은 “업무상의 재해”에 관해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근로자의 부상·질병·신체장해 또는 사망”이라고만 정의하고 있었다(2007.4.11. 법률 제8373호로 전부 개정되기 전의 구 산재보험법 제4조제1호).

2) 다만 업무상 재해의 개념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정함으로써 포괄 위임의 논란이 제기된 사정 등을 반영하여, 2007.4.11. 법률 제8373호로 전부 개정된 산재보험법 제37조는 “근로자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로 부상·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사망하면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다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면서 그 인정 기준을 법률 차원에서 성문화하였다. 이 조항은 제1항제1호 바목에서 ‘업무상 사고’ 중 하나로 “그 밖에 업무와 관련하여 발생한 사고”를 정함과 아울러 제2호 다목에서 ‘업무상 질병’ 중 하나로 “그 밖에 업무와 관련하여 발생한 질병”을 규정했다. 이로써 자해 내지 자살에 대해서도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여지가 한층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같은 조제2항은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나 범죄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은 업무상의 재해로 보지 아니한다. 다만, 그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이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한 행위로 발생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으면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고 하여, ‘자해행위’의 경우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다. 그리고 같은 조제3항은 업무상 재해의 구체적 인정 기준을 대통령령에 위임하였다(현행 산재보험법 제37조제5항).

3) 그 위임에 따라, 2008.6.25. 대통령령 제20875호로 전부 개정된 산재보험법 시행령 제36조(자해행위에 따른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 기준)는 산재보험법 제37조제2항 단서를 구체화하여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제1호),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제2호),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제3호)를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산재보험법 시행령 제36조제3호는 2020.1.7. 대통령령 제30334호로 산재보험법 시행령이 개정·시행되면서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의 시행령 개정 이유(고용노동부)를 보면 “자해행위에 따른 업무상 재해의 인정에서 엄격하게 운영되던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를 상당인과관계가 있는 경우로 완화함으로써 업무로 인한 자해행위에 대한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보호 범위를 확대”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나. 판례의 추이

1) 망인이 한국○○공사에서 근무하던 중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사건을 다룬 대법원 2008.3.13. 선고 2007두2029 판결은, 인과관계 유무가 “반드시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의 유무로써 판단”되어야 한다면서도 “자살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므로 “근로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우울증이 발생하였고 그 우울증이 자살의 동기 내지 원인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정만으로 곧 업무와 자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함부로 추단해서는” 안 되며 “자살자의 나이와 성행 및 직위,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자에게 가한 긴장도 내지 중압감의 정도와 지속시간, 자살자의 신체적·정신적 상황과 자살자를 둘러싼 주위상황, 우울증의 발병과 자살행위의 시기 기타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기존 정신질환의 유무 및 가족력 등에 비추어 그 자살이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보아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 아닌 한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법리를 판시하였다.

나아가 택시 회사의 기사 내지 배차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망인이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건을 다룬 대법원 2012.3.15. 선고 2011두24644 판결은 위와 같은 2007두2029 판결의 법리를 그대로 원용함과 아울러 “근로자가 자살한 경우에도 자살의 원인이 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업무에 기인한 것인지 여부는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 등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게 되나, 당해 근로자가 업무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는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앞서 본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제1심판결은 이러한 판례들의 법리를 주된 판단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2) 위 1)항 기재 판례들의 법리를 살펴보면, 업무상 스트레스와 자해행위·자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에 관해 “자살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의사”라는 전제 아래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보아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상 스트레스인지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라는 취지로 이해된다. 이에 따라 상당히 좁은 범위 내에서 엄격하게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한다고 할 수 있다.

3) 그런데 이후 선고된 대법원 2017.5.31. 선고 2016두58840 판결은, 은행원(지점장)이 영업실정 등에 관한 업무상 부담 등으로 우울증을 진단받아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출근 후 자살한 사안에서 상당인과관계를 긍정하면서 “근로자가 극심한 업무상의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으로 우울증세가 악화되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하여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추단할 수 있는 경우라면 망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고, 비록 그 과정에서 “망인의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인 취약성이 자살을 결의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자살 직전에 환각, 망상, 와해된 언행 등의 정신병적 증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라는 법리를 판시하였다.

나아가 대법원 2021.10.14. 선고 2021두34275 판결은, 건설공사 현장에서 작업 중 추락한 뒤 하반신 마비 등으로 산재요양승인을 받은 망인이 이후 자살한 사안에 관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위 2016두58840 판결의 법리와 함께 “근로자의 질병이나 후유증상의 정도, 그 질병의 일반적 증상, 요양기간, 회복가능성 유무, 연령, 신체적·심리적 상황, 근로자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상황,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사망의 원인이 된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적어도 업무상 재해가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에 겹쳐서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다면 그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법리를 판시하였다.

한편 위와 같은 법리를 정면으로 판시한 판례들 이전에 선고된 대법원 2015.1.15. 선고 2013두23461 판결도 “망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으며, 비록 망인에게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은 구체적인 병력이 없다거나 망인의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인 취약성이 자살을 결의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망인이 토목직 사원으로 회사에 입사한 후 쿠웨이트 정유플랜트 공사의 P팀장 업무를 맡게 되어 쿠웨이트 파견 근무가 예정되자 영어 사용 문제로 큰 부담을 느꼈고, 공사 현장에 출장을 다녀온 이후 P팀장 업무를 도저히 수행할 수 없다고 느껴 해외근무 불원 의사를 밝혔으며(회사가 그 의사를 수용했다), 망인이 수첩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갑갑하고 답답하다. 영어 때문에 쿠웨이트에 못 간다. 쪽 팔린다. 국내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외부 일자리도 없고, 퇴직한다고 챙겨지는 것도 없고…”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고, 결국 망인이 회사 본사 건물에서 건물 밖으로 뛰어내려 사망한 사안(사망하기 전까지 정신질환으로 치료받은 적은 없었다)에 관한 것으로서 이 사건과 상당 부분 유사성이 있다. 대법원은 위 사안에서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한 원심판결을 파기하였다.

4) 위 3)항 기재 판례들은 의학적·자연과학적 증명뿐 아니라 규범적 관점에서 판단한다는 대전제가 위 1)항 기재 판례들과 같지만, “사회평균인을 기준으로 업무상 스트레스의 정도 내지 이로 인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종전의 법리나 이를 전제로 한 판단 내용은 찾기 어렵다. 아울러 위 2011두24644 판결의 경우 “망인이 우울증을 앓게 된 주요 원인은 내성적이면서 꼼꼼한 성격, 지나친 책임의식, 예민함 등 개인적 소인”에 있다는 사정 등을 거론한 반면, 위 2016두58840 판결은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 취약성이나 환각 등의 정신병적 증상 유무를 고려할 것이 아니라고 판시한 점이 눈에 띈다.

5) 위 판례의 추이 등을 종합하면, 비록 명시적인 판례 변경은 없었더라도, 2007년 산재보험법 전부 개정으로 업무상 사고 내지 업무상 질병의 범위가 폭넓게 명시된 점, 자해행위에 따른 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을 정한 산재보험법 시행령이 2020년에 이르러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대신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로 개정된 점 등이 반영되어, 자해행위로 인한 업무상 재해의 인정 범위가 종전보다 확장된 것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자살이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라는 전통적 관점 대신, 자살에 이르게 만든 정신질환 등에 주목하여 신체적 질병과 다를 바 없는 “질병”의 범주에 정면으로 포섭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관점의 전환이 위와 같은 법령의 개정이나 판례 경향의 변화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 이 사건의 판단 기준

이와 같은 관련 법령의 취지와 그 변천, 판례의 추이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에서도 위 2016두58840 판결 및 2021두3425 판결의 법리를 중심으로 업무상 재해의 인정 기준을 설정함이 타당하다. 그것이 2007년에 개정된 산재보험법 제37조제1항의 문언 형식에도 불구하고 상당인과관계의 증명책임이 근로자 측에 있다고 해석하는 전제, 즉 대법원이 “산재보험제도의 헌법적 근거와 입법 취지 등을 고려하여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의 의미를 규범적이고 법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구체적인 사안에서 업무상 재해의 발생 원인이나 유형별 특징, 증거가 편재된 사정과 증명의 난이도 등을 고려하여 근로자 측의 증명부담을 완화·경감하기 위한 판례 법리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온” 방향성(대법원 2021.9.9. 선고 2017두45933 전원합의체 판결)에도 부합하는 해석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①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 증명해야 하지만,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증명이 있다[이와 관련하여, 이 사건에 직접 적용되는 법령은 일응 이 사건 처분일인 2019.9.23. 당시의 법령 즉 2020.1. 7. 대통령령 제30334호로 개정되기 전의 구 산재보험법 시행령 제36조제3호(“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규범적 관점에서의 상당인과관계 인정은, 산업재해 전반에 걸쳐 확립된 업무상 재해의 인정 기준으로서 종래부터 판례가 수없이 판시해 온 확고한 입장이다. 자해행위로 인한 업무상 재해의 인정 여부가 문제되는 이 사건의 경우에도 다를 것은 없다. 현행 산재보험법 시행령 제36조제3호(“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의 개정 이유를 보면, 기존의 시행령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하였다는 반성적 고려에서 그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의학적’ 기준 대신 ‘상당인과관계’로 개정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개정 경위와 목적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개정 시행령의 시행일이 2020.1.7.임에 비추어, 이 사건 처분일이 그 시행일과 사이에 큰 시간적 차이가 없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② 근로자가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으로 우울증세가 악화되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하여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추단할 수 있는 경우라면, 근로자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다.

③ 그와 같은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근로자의 질병이나 후유증상의 정도, 그 질병의 일반적 증상, 요양기간, 회복가능성 유무, 연령, 신체적·심리적 상황, 근로자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상황,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④ 그 과정에서 근로자의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인 취약성이 자살을 결의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자살 직전에 환각, 망상, 와해된 언행 등의 정신병적 증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다.

 

3.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이 법원의 판단

 

앞서 본 인정사실에 갑 제22호증, 을 제1, 2호증의 각 기재와 제1심 증인 H의 증언, 이 법원 감정서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인정·추론할 수 있는 아래 사실·사정 내지 판단요소들을 종합하여 위 2항 기재 법령·법리와 판단 기준에 비추어 보면, 고인은 자살 직전 극심한 업무상의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우울증세가 발병·악화된 나머지 정상적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해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고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

 

가. 앞서 ‘미국 출장 사건’에서 본 대로, 고인은 미국 공항 입국심사장에서 영어 구술능력이 부족해 1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입국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고인은 영어 토익(TOEIC) 점수가 높다는 이유로 갑자기 미국 출장이 결정되었고, 고인은 H에게 과장·부장·상무·부사장 등과 동행하는 출장이라 많이 부담된다는 소회를 털어 놓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 L 대표는 귀국 후 팀장 회의에서 (구체적 발언·태도는 기록상 알기 어렵지만) 고인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것은 다른 사원을 통해 고인에게도 전달되었다. 이 무렵 고인은 H을 비롯한 동료 사원들에게 “출장 가서 힘들었다”, “내가 뭘 잘 하는지 모르겠다”, “이 나이 먹도록 이 정도밖에 안 되네”라며 자책하는 발언을 반복했다. 고인으로서는 당시 미국 출장이 결정된 경위나 그곳에서 있었던 입국심사 지연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데다가, 상사가 이를 지적하는 등의 사정이 겹치자 상당히 심각한 정도의 우울감 내지 자존감 저하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다. 나아가 귀국 이후 고인의 직속 상사로서 고인이 정신적으로 상당히 의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M 대리가 육아휴직하게 된 사정, 거듭된 고인의 업무상 실수에 팀장이 “무슨 일 있냐?”면서 일상적 언동에 가까운 질문을 했음에도 “제가 이걸 또 잘못해서 큰일 난 건가요?”라는 등의 태도를 보여 팀장이 다독이기까지 한 사정, 고인이 평소 익숙하지 않았던 ‘<아파트명>’ 아파트(펜트하우스형 아파트)의 조명기구 설계업무를 맡게 된 사정 등을 종합하면, 고인의 우울감 내지 자존감 저하와 같은 병적 감정이 이 무렵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출장 이후 자존감이 없어졌다”, “원래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고”, “M 대리님이 가신 이후 두려움(대리님한테 의존했음)”, “미국 출장에서 내 포장지가 벗겨진 기분. 알맹이의 내용이 거짓, 과장이 심했던” 등의 메모 내용을 보더라도 그렇다.

메모 내용 중에는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 등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다짐하는 부분이 있다. 고인이 M 대리에게 보낸 편지 내용도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결국 자살에 이른 사람들이 우울증 등의 정신적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그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으로 봄이 옳다. 우울증의 발생·악화와 이로 인해 자살에 이르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이것이 ‘극심한 업무상의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았다는 부정적 징표라고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

 

라. 고인은 이후 무단결근, 부모 및 친구와의 대화를 거친 다음, 결국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인은 “나 심각하게 우울증이 온 것 같아. 아무것도 못 하겠어. 내가 너무 한심하고 싶어서 바꾸고 싶은데 무기력해서 바꿀 힘도 없고,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든다.”(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라는 등으로 직접적 위기의식을 표출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들과 위 가 ~ 다.항 기재 사실·사정들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고인의 신체적·정신적 상황과 고인을 둘러싼 주위상황, 우울증세의 발현과 악화 정도, 업무상 스트레스가 고인에게 가한 긴장도·중압감의 정도와 지속 시간 등을 종합하면, 당시 고인이 정상적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마. 이에 대해 피고는, ① 미국 출장 과정에서 출장자 중 어느 누구도 입국 지연을 언급하지 않았고 출장 후에도 이와 관련된 (직접적) 질책이나 불이익이 없었다, ② 출장 중 실제로 영어를 사용해야 할 업무가 드물어 이로 인한 부담이나 중압감이 과중했다고 볼 수 없으며, 업무 특성상 반복적인 야근 또는 초과근무가 필요하지 않았고 <팀명>의 구성에 비추어 고인의 업무량이 많았다고 할 수 없다, ③ 자살 시도 전 수일간의 상태가 고인이 자유의지로 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을 원고 측이 의학적·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등의 취지로 주장한다.

1) 이 사건 기록을 살펴볼 때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에 따른 직장 내 괴롭힘” 또는 이에 준하는 정도의 행위가 이 사건 사업장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 업무상 실수에 대한 고인의 자책에 팀장이 괜찮다며 다독여 주었던 사실, 고인의 무단결근과 그 사유를 알게 된 이 사건 사업장이 휴가를 부여하고 팀장이 면담 약속을 잡기도 했던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기도 하다. 원고의 주장처럼 이 사건 사업장에서 있었던 고인을 향한 언동이 이른바 ‘수동 공격’에 해당하는지도 의문이 있다.

2) 하지만 고인이 우울증세를 앓은 전력은 이 사건 기록에서 찾기 어렵다. 오히려 2016.5.25.자 건강검진에서는 ‘정상’의 종합 소견이 제시되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업무상 스트레스를 제외하고는, 다른 요인으로 인해 정신적·육체적으로 우울증 등의 증세가 발생·악화되었다고 볼 만한 자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유족문답서(갑 제3호증)에는, 고인이 미국 출장 이전까지는 회사 출근이 즐겁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입국 심사 지연 등으로 인한 업무상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 되어, 고인의 우울증세가 발병·악화된 나머지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산재보험법 제37조제1항이 정하는 “그 밖에 업무와 관련하여 발생한 사고”(제1호 바목) 내지 “그 밖에 업무와 관련하여 발생한 질병”(제2호 라목)에 해당한다.

3) 미국 출장 중에, 그리고 귀국 후 이 사건 사업장에서의 업무가 특별히 과중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점은 피고 주장과 같다. 하지만 이를 내세우는 피고의 위 ①, ② 주장과 같은 논리는 결국 앞서 본 종전 판례의 관점, 즉 자살이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보아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어야만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사건을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은 앞서 제2의 다.항에서 본 대로이다.

설령 그와 같은 견지에서 바라본다 하더라도, 고인은 국내 유수의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여성으로 나날이 격화되어 가는 치열한 학력·취직의 경쟁을 뚫고 이 사건 사업장과 같이 상당한 인지도와 평판이 있는 회사에 입사·근무하게 되었는데, 입사 2년차 때 사원들 중 토익 점수가 제일 높다는 이유로 선발되어 미국 출장을 가자마자 그 문턱에서 그리고 상사들 모두 인지한 상태에서 작금의 우리 사회가 능력자의 바로미터로 여기는 ‘영어’의 구술능력 부족으로 입국 심사가 장시간 지연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느꼈을 고인의 깊은 좌절감·수치심이나 심각한 자존감의 저하, 그래서 고인이 자신에 대해 “미국 출장에서 내 포장지가 벗겨진 기분. 알맹이의 내용이 거짓, 과장이 심했던” 것으로 표현했던 사정 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고인의 업무시간이나 업무량 등과 같은 판단요소들만 심사 대상으로 삼아 업무상 재해의 인정 여부를 곧바로 판정할 수는 없다.

아울러 고인의 메모 내용에도 나오듯이, 고인은 평소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내성적인 성격 등이 자살을 결의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는 고려할 것이 아니다. 이 법원 감정서에는 심신상실 혹은 정신착란 등의 상태에 있었다고 볼 자료가 없다는 내용도 담겨 있지만, 이러한 사정 역시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할 요소가 될 수 없다.

4) 피고의 ③ 주장은 인과관계가 ‘의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그 인과관계가 명백히 증명되는 경우뿐 아니라,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도 그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법원 감정의는 대부분의 질의에 명확한 판단을 유보하면서도 ‘고인에게 우울 증상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명백하게 그 소견을 제시했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하면, 이 법원 감정의가 결과적으로 이 사건 처분의 기초가 된 Q질병판정위원회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소견을 제시했다고 해서 그 인과관계를 부인할 것은 아니다.

 

4.  결론

 

이와 달리 업무상 스트레스·정신적 고통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원고의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 청구를 거부한 이 사건 처분은 위법하다. 이 사건 처분은 취소되어야 한다. 그 취소를 구하는 원고의 이 사건 청구는 받아들여야 한다. 제1심판결은 이와 결론이 달라 부당하다. 그러므로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이 사건 처분을 취소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젊은 나이에 너무도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김무신(재판장) 김승주 조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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