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요지>
[1] 민사소송법은 ‘처분권주의’라는 제목으로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하여는 판결하지 못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민사소송에서 심판 대상은 원고의 의사에 따라 특정되고,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한 사항에 대하여 신청 범위 내에서만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1982.4.27. 선고 81다카550 판결, 대법원 2013.5.9. 선고 2011다61646 판결 등 참조).
[2] 선행판결이나 약정에 따른 의무 위반을 원인으로 하는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상 영업비밀침해를 원인으로 하는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와는 그 요건과 증명책임을 달리하는 전혀 별개의 소송물이다. 따라서 원고와 피고가 비록 영업비밀성에 관한 공방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원고의 주위적 청구에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침해를 원인으로 하는 청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기술제휴계약 위반을 이유로 피고에 대하여 기술정보 이용 등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원고가 다시 이 사건으로 위 판결에 따른 피고의 의무 위반을 이유로 제품의 제조 금지 및 손해배상을 구하였는데, 피고는 ‘선행판결의 효력이 영업비밀에 한정되고 영업비밀성이 소멸되어 더 이상 그 사용이 제한되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영업비밀성을 다투었고, 원고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영업비밀성이 인정된다고 주장한 사건임.
원심은 원고의 청구에 영업비밀침해를 원인으로 한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가 포함된 것으로 선해하여 이를 인용하였으나, 이 판결은 이러한 원심판단이 처분권주의에 반한다고 보아 파기환송함.
이 판결은 부가적으로, 영업비밀침해를 선택적 청구원인으로 주장한 것으로 선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원고 특정 기술정보의 비공지성, 비밀관리성, 금지기간 도과 여부 등에 판단에도 심리미진 등의 잘못이 있다고 판단함.
【대법원 2020.1.30. 선고 2015다49422 판결】
• 대법원 제3부 판결
• 사 건 / 2015다49422 손해배상등
• 원고, 피상고인 겸 상고인 / ○○○○○○○ ○○
• 피고, 상고인 겸 피상고인 / ○○기계공업 주식회사
• 원심판결 / 서울고등법원 2015.7.9. 선고 2013나27475 판결
• 판결선고 / 2020.1.30.
<주 문>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이 유>
상고이유(상고이유서 제출기간이 지난 다음 제출된 상고이유보충서 등은 이를 보충하는 범위에서)를 판단한다.
1. 사건 개요
원심판결 이유와 적법하게 채택된 증거에 따르면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가. 원고와 피고는 모두 봉강절단기를 제조·판매하는 회사이다. 피고는 1993년경부터 제조·판매한 봉강절단기가 원고의 봉강절단기를 모방한 것이 문제되자, 1995.8.31. 원고와 기술제휴계약(이하 ‘이 사건 기술제휴계약’이라 한다)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원고가 피고에게 봉강절단기 제작 기술을 이전하고, 피고는 제작실시료로 판매가격의 15%를 지급하며, 7년의 계약 기간이 종료되거나 계약이 파기된 경우에는 피고는 위 계약에 따라 이전받은 원고의 기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 피고는 이 사건 기술제휴계약에 따라 원고로부터 봉강절단기 제품에 관한 도면 2,100장을 제공받아 1995.8.24.부터 1999.2.24.까지 ○○○○ 등 여러 업체에 봉강절단기를 제조·판매하고도 이를 원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다.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기술제휴계약 위반을 이유로 위약금 등 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항소심은 2002.9.25. 봉강절단기의 제작·판매·위탁 금지, 원심판결 별지 2에 기재된 원고의 고유기술(이하 ‘원고 고유기술’이라 한다)에 대한 사용·유포 금지, 도면, 문서 등의 인도청구를 모두 받아들이고, 손해배상청구 부분에 대해서는 청구액 중 일부인 5억 원과 그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서울고등법원 2001나40024 판결, 이하 ‘선행판결’이라 한다)을 선고하였다. 이에 피고가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대법원 2003.2.11. 선고 2002다59658 판결).
라. 원고와 피고는 2004.3.15. 피고가 선행판결에 따른 금전지급의무 중 일부를 면제받고, 선행판결에 따른 나머지 의무를 성실히 준수하기로 약정하였다(이하 ‘2004.3.15.자 약정’이라 한다).
마. 피고는 2005.8.22.부터 2012.9.1.까지 원심판결 별지 3 기재와 같이 봉강절단기 17대를 판매금액 합계 5,824,487,048원에 제조·판매하였다.
2. 소송 경과와 원심 판단
가.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선행판결 또는 2004.3.15.자 약정에 따른 원고 고유기술 사용 금지의무 위반을 주위적 청구원인으로 하여 ➀ 원심판결 별지 1 봉강절단기의 제조 금지, ➁ 원심판결 별지 3의 봉강절단기 제조·판매로 인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다. 피고는 선행판결에 따라 사용이 제한되는 원고 고유기술은 공지되지 않은 노하우 또는 영업비밀에 한정되는데 이 부분이 특정되지 않았고 주장·증명되지도 않았으며, 선행판결의 변론종결 이후 원고 고유기술의 영업비밀성이 소멸하였는데도 선행판결 또는 기술제휴약정에 따라 피고에게 영구적인 사용금지를 구하는 것은 기판력의 시적 범위에 관한 법리에 반하거나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되지 않고, 피고는 원고 고유기술을 사용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제1심 법원은 피고의 선행판결에 따른 의무 위반을 인정하여 봉강절단기의 제조 금지 청구와 손해배상청구 중 일부(총 판매금액의 15%)를 인용하였다.
나. 원고와 피고 모두 제1심 판결에 대하여 항소하였다. 원고는 제1심 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의 지연손해금 기산일에 관해서만 다투고, 제1심에서의 청구원인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원고는 주위적 청구가 원고 고유기술이 특허로서의 효력 또는 영업비밀성을 상실하였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선행판결에 따른 의무 위반을 원인으로 하는 청구임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원고는 재판부의 석명에 따라 원고가 피고에게 제공한 도면들을 제출하고, 위 도면상 특허 등에 의해 공지되지 않은 원고의 노하우, 영업비밀 등을 특정하여 이 부분(이하 ‘원고 특정 기술정보’라 한다)이 원고 고유기술이자 영업비밀이고, 피고가 이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하며 제1심에서와 같은 피고 주장을 반박하였다.
다. 원심은 원고가 원심에서 주위적 청구에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부정경쟁방지법’이라 한다) 제10조제1항에 따른 금지 청구, 제11조에 따른 손해배상청구를 선택적으로 추가하였다고 선해하였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이유로, 위 금지 청구를 인용하고 부정경쟁방지법 제14조의2 제5항에 따른 상당한 손해액으로 총 판매금액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의 지급을 명하였다.
원고 특정 기술정보 중 ‘구동실린더가 4륜 롤러의 상측에 위치하는 구조’를 제외한 나머지 정보는 공연히 알려지지 않은 정보이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며, 비밀로 유지하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한 것으로 영업비밀에 해당한다. 피고가 원고 특정 기술정보 중 ‘유압기기, 에어기기 및 배관, 리미트 스위치, 벨로즈’를 제외한 나머지 기술정보를 사용하여 원심판결 별지 3 봉강절단기를 제조·판매하였다. 피고는 침해 금지기간이 지났다고 주장하나, 피고가 침해한 원고의 영업비밀의 침해 금지기간이 지났거나, 그 기간이 언제까지라고 합리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
3. 피고의 상고이유에 대한 판단
가. 처분권주의 위반 여부
민사소송법은 ‘처분권주의’라는 제목으로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하여는 판결하지 못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민사소송에서 심판 대상은 원고의 의사에 따라 특정되고,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한 사항에 대하여 신청 범위 내에서만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1982.4.27. 선고 81다카550 판결, 대법원 2013.5.9. 선고 2011다61646 판결 등 참조).
원고는 선행판결에 따른 의무 위반 또는 2004.3.15.자 약정에 따른 의무 위반을 주위적 청구원인으로 일관되게 유지하며 다만 ‘선행판결의 효력이 영업비밀에 한정되고, 영업비밀성이 소멸되어 더 이상 그 사용이 제한되지 않는다’는 피고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원고 특정 기술정보가 원고의 노하우이자 영업비밀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선행판결이나 2004.3.15.자 약정에 따른 의무 위반을 원인으로 하는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는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침해를 원인으로 하는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와는 그 요건과 증명책임을 달리하는 전혀 별개의 소송물이다. 따라서 원고와 피고가 비록 영업비밀성에 관한 공방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원고의 주위적 청구에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침해를 원인으로 하는 청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심 판단에는 원고가 신청하지도 않은 사항에 대하여 판결함으로써 민사소송법 제203조에서 정한 처분권주의를 위반한 잘못이 있다. 이를 지적하는 피고의 상고이유 주장은 정당하다.
나. 영업비밀성 인정 여부
(1) 나아가 원고가 영업비밀침해를 선택적 청구원인으로 주장한 것으로 선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원심판결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2) 구 부정경쟁방지법(2015.1.28. 법률 제13081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2조제2호는 ‘영업비밀’이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서, 상당한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된 생산방법, 판매방법, 그 밖에 영업활동에 유용한 기술상 또는 경영상의 정보를 말한다.”라고 정하고 있었다. 그 후 2015.1.28. 법률 제13081호로 위 조항이 개정되면서 ‘상당한 노력’이라는 문구가 ‘합리적인 노력’이라는 문구로 바뀌었고, 2019.1.8. 법률 제16204호로 다시 개정되면서 ‘합리적인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라는 문구가 ‘비밀로 관리’라는 문구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손해배상청구에 대해서는 침해행위 시를 기준으로 2015.1.28. 법률 제13081호로 개정되기 전의 구 부정경쟁방지법 제2조제2호가 적용되나, 금지 청구에 대해서는 원심 변론종결 시에 시행 중인 법률이 적용된다. 위 조항에서 정한 영업비밀에 해당하는지는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은지,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지, 비밀로 유지되거나 관리되고 있는지에 관하여 개정 전후의 조항에 따라 판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영업비밀 침해행위의 금지는 영업비밀 보호기간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3) 이러한 법리와 기록에 비추어 살펴본다.
(가) 원고는 선행판결이 나오기 약 20년 전부터 봉강절단기를 제조하여 국내의 70여 개 업체에 수출하였고, 피고도 원고와 이 사건 기술제휴계약을 체결한 후 △△금속 주식회사와 □□산업 주식회사에 봉강절단기 450톤 1대씩을 공급하고 원고에게 기술제휴계약에 따른 실시료를 지급하였다. 원고와 피고가 구매자들과 봉강절단기 관련 비밀유지약정을 체결하는 등 봉강절단기 관련 기술정보의 비밀유지를 위해 어떠한 조치를 취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나) 봉강절단기는 부품들의 크기가 미세하지 않고, 유지보수와 개선 등을 위하여 부품들 조립과 분해가 가능하며, 분해와 재조립을 거치더라도 기능이 손상되지 않는 공작기계여서, 실제 제품의 구성을 분해해 보는 것만으로도 원고 특정 기술정보 중 부품의 채부, 부품의 형태·수치와 같은 형상에 관한 정보는 쉽게 알 수 있다.
(다) 그 밖에 원고 특정 기술정보 중 도면에 기재된 공차, 재질, 열처리 방법(조질, 담금질, 소둔), 경도 지정, 표면 마무리 기호, 접속 부품의 감합 정밀도 등의 기술정보는 형상 정보와 같이 바로 알 수 있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봉강절단기 특성에 비추어 역설계가 용이하다고 판단될 가능성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역설계에 드는 기간, 난이도 등에 관하여 필요한 심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원고는 원심 변론종결 당시까지 영업비밀침해를 청구원인으로 주장한 적이 없고, 피고는 ‘선행판결의 효력이 영업비밀에 한정되고 영업비밀성이 소멸되어 더 이상 그 사용이 제한되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영업비밀성을 다투었을 뿐이어서, 이에 관한 증명부족을 피고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따라서 원고가 영업비밀침해를 선택적 청구원인으로 주장한 것으로 선해하더라도 원심판결에는 원고 특정 기술정보의 비공지성, 비밀관리성, 금지기간 도과 여부 등에 관하여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 이를 지적하는 피고의 상고이유 주장은 정당하다.
4. 결론
피고의 나머지 상고이유와 원고의 상고이유에 대한 판단을 생략한 채,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하기로 하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법관 이동원(재판장) 조희대 김재형(주심) 민유숙